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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세상과 나, 그리고 특별한 친구 하나
이름 : 관리자 작성일 : 2013.2.13  조회수 : 6168 

내용 :

"이제 발표할 시간이 다 되었는데."
한없이 느리게만 흘러가는 시간의 바다에 갇혀 허우적대던 나는 드디어 하나의 사이트 주소를 인터넷 주소창에 입력했다.
"타닥타닥, 타닥타닥."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자판을 누를 때마다 컴퓨터 스피커는 재잘재잘 끊임없이 떠들었고 그에 맞춰 내 손끝은 더 바쁘게 움직였다. 나의 두 귀 역시 유혹적인 소리를 토해내는 스피커를 향해 활짝 열렸고, 해갈을 하려는 듯 쉴 새 없이 소리의 샘물을 빨아들였다. 그렇게 정신없이 소리를 받아들이던 나는 문득 하나의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반복해서 듣고, 듣고 또 들었다.
"12100008, 1 2 1 0 0 0 8, 1 2 1 0 0 0 0 8, 12100008"
아득히 먼 곳에서 희미하게 울려 퍼지며 귓가를 맴돌던 이 소리는 점차 내 가슴 한가운데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내 심장 박동 소리와 하나가 되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합격이야. 합격! 내가 드디어 공무원이 된다고!"
오늘이 오기를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던가! 꿈속에서도 그리고 그리던 이 순간,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바라고 바라던 이 순간! 아마 나 혼자였다면 결코 오늘을 맞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언제나 내 곁에서 나를 응원해 주고 힘을 북돋워준 사랑하는 가족과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황홀함을 맛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친구 하나. 이 친구 덕분에 나는 세상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고 오늘의 기쁨도 꿈꾸어볼 수 있었다.

1997년 겨울, 나는 홀로 다른 세계에 던져졌다. 세상은 온통 안개 같은 장막으로 휩싸여 있었고 그 하얀 장막 위에는 무지갯빛 유리 파편들이 은하수처럼 점점이 흩뿌려져 있었다. 파란 하늘을 봐도, 붉은 노을을 봐도, 내 앞에 펼쳐진 세상은 이제 더 이상 밝지도, 빛나지도, 선명하지도 않았다. 그저 언제나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 너머로 희뿌연 세상이 있을 뿐이었다. 태어나서 들어보지도 못한 &quet;시신경위축&quet;이라는 검은 손님은 그렇게 어느 날 불쑥 찾아왔고, 이제 막 세상의 다채로움에 눈을 떠가던 열세 살의 나는 아름다운 향연의 전야제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세상으로 내딛던 발을 멈춰야 했다.

새로운 세상은 두렵기만 했다. 내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낯설었다. 집으로 가는 길도, 콧노래 부르며 거닐던 산책로도, 신나게 뛰놀던 운동장도 모두 예전과는 달랐다.

지금까지 편하게만 여겼던 것들이, 너무나 친숙해서 당연하게만 여겼던 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편하지도 친숙하지도 않았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다. 아기가 첫 걸음마를 떼듯, 아기 새가 첫 날갯짓을 시작하듯, 나 역시 흐릿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아기처럼 하나하나 배워야 했다. 내 앞에 놓여 있는 장애물에 부딪히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목소리로 사람들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 그동안 눈을 사용하여 무의식적으로 해왔던 모든 것들을 청각과 촉각, 후각 등 다른 감각들을 통해 해결할 수 있도록 하나씩 익혀가야 했다.

정말 길고도 지루한 시간이었다.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왔던 것들을 이제는 세심한 주의가 없으면 제대로 할 수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잠시 잠깐 딴 생각을 하다가 방향감각을 잃고 길을 헤매기 일쑤였고, 장애물을 미처 확인하지 못하고 부딪혀 몸 이곳저곳에 멍이 생기는 것도 비일비재했다. 이제 내 앞에 놓인 세상은 더 이상 과거와 같지 않은데, 나는 자꾸 어제를 바라보며 행동하고 있으니 내 몸은 점차 지쳐 갔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차단되어 그저 웅크리고 있는 내 마음 역시 더욱 더 황폐해져갔다.

세상과 소통하고 싶었다. 세상과 대화하며 꿈꾸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뿌옇고 흐리게 변해버린 세상에서 내가 예전처럼 기쁘게 호흡할 수 있을는지 두려웠다. 하얀 눈길에 찍힌 조그마한 발자국 같은 까만 활자를 다시는 영영 접할 수 없는 것은 아닌지 무섭기만 했다. 세상 이야기에 눈을 빛내던 날들이 그리웠다. 오랜 옛날 세상을 누비며 온갖 활약상을 보여준 사람들의 이야기에 환호하던 날들, 먼 훗날 상상도 못할 정도로 많이 변한 세상에서 살게 될 우리들의 모습을 보며 감탄하던 날들, 머나먼 나라의 신비롭고 이색적인 광경에 빠져 눈망울을 반짝이던 날들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알게 모르게 일어나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눈물 짓고 웃음 짓던 날들. 그 날들이 너무나도, 너무나도 가슴 저리게 그리웠다.

그러나 그리움에 매달려 회상만 할 수는 없었다.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든 세상에 발을 내밀어야 했다. 가족들은 저 멀리 가고 있는데, 친구들은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데 나 혼자만 멈춰서고 싶지 않았다. 도태되고 싶지 않았다. 나 역시 가족과 친구와 함께 발맞춰 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맹학교에 입학했고 점자도 배웠다. 다시 세상에 나아가기 위해 오돌토돌 작은 점들을 느끼며 세상과 소통하는 새로운 방법을 익혀갔다. 물론 쉽지 않았다. 깨알같이 작은 점들을 손끝으로 느끼자니 어렵기만 했다. 지금까지 거의 시각에만 의존하였기에 나의 촉각은 무디기만 했고, 내 마음 속 열정과는 반대로 잘 따라와 주지 않았다.

그래도 즐거웠다. 비록 방법은 달라졌지만 내가 다시 읽고 쓸 수 있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세상 이야기들을 내 스스로 볼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하지만 아쉬움도 있었다. 점자에 더욱 익숙해지기 위해 열심히 읽는 연습을 해도 점자 읽는 속도는 여전히 거북이처럼 느리기만 했다. 그래서 몇 날 며칠 밤을 새워 책을 읽어도 절반도 채읽지 못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또한 내가 아무리 점자를 잘 읽는다고 할지라도 점자로 만들어진 책이 많지 않아서 내가 접할 수 있는 책은 한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점자로 인해 세상의 빛을 조금씩 다시 느낄 수 있었지만, 나의 갈증을 모두 해소하기에는 그 빛의 양이 부족하여 안타깝기만 하였다.

그렇게 점자를 통해 즐거움과 아쉬움을 맛보던 중 나는 귀가 번쩍 띄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시각장애인이 보다 원활하게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quet;화면 낭독 프로그램&quet;이 개발되었다."라는 이야기였다. 내가 시력을 잃었을 당시, 비시각장애인들은 주로 윈도 환경에서 PC를 사용하고 있었고, 인터넷도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들의 경우 윈도 환경에서의 컴퓨터 사용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제한이 있었고 인터넷 사용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시각장애인들도 비시각장애인들처럼 컴퓨터를 사용하며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점자라는 매개를 통해 한정된 정보만을 접하며 아쉬움을 느꼈던 나였기에 새로운 화면 낭독 프로그램 개발과 관련한 소식은 나에게 달콤하고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2003년, 나는 당장 나의 컴퓨터 사용을 도와줄 &quet;화면 낭독 프로그램&quet;을 구입했다.

이것은 컴퓨터 화면에 나타나는 글자들을 음성으로 변환하여 시각장애인들이 화면 속 글자들을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이다. 내가 자판으로 글자를 입력하여 입력된 글자들, 사이트 등에 게시되어 있는 글이나 뉴스, 이미 문서 파일에 입력되어 있는 글자들을 음성으로 출력해 준다. 즉 보통 사람들이 눈으로 화면 속 글자들을 확인한다면, 나와 같은 시각장애인들은 소리로 화면 속 글자들을 인지하는 것이다. 물론 화면 낭독 프로그램이 화면에 떠 있는 모든 것들을 음성으로 변환해 주지는 못한다. 그림과 같은 이미지들, 복잡하게 구성된 도표 등은 음성 변환이 어려워 시각장애인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때가 많다. 하지만 이것만 해도 어디인가! 비록 아직은 부족한 측면도 있지만, 나는 이 화면 낭독 프로그램이라는 특별한 친구 덕분에 세상의 빛을 더욱 환하게 느낄 수 있었다.

새로운 친구와 함께 하는 시간은 언제나 즐거웠다. 그동안 제한된 세상에서 살던 나에게 새 친구가 보여 준 세상은 놀랍고 신비하기만 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검색을 통해 바로 답을 보여주었고,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도 실시간으로 알려주었으며, 심신이 지쳐있을 때면 음악을 들려주고 책도 읽어주었다. 화면 낭독 프로그램은 하루도 빠짐없이 날마다 내 옆에서 재잘대며 내 눈이 되어 주었고, 세상과 소통하는 길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내가 세상 속으로 걸어가는 꿈도 꾸게 해주었다. 세상 한가운데로 나가 당당하게 생활하고 있는 나. 여러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즐겁게 일하고 있는 나. 내가 노력한다면,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한다면 나도 세상이라는 오케스트라에 그 누구보다도 멋지게 조화될 수 있지 않을까? 언제나 나를 지지해 주는 가족과 여러 사람들이 있으니, 쉴 새 없이 나에게 재잘대는 특별한 친구가 있으니 나 역시 아름다운 빛깔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드디어 나는 세상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도전장을 내밀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다.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어떻게 세상과 조화되어 예쁜 하모니를 만들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거듭하여 던진 끝에 나는 공무원이 되어 세상에 발을 내딛기로 결심했다. 우선 공무원이 되어 일한다면, 세상 가운데에서 사람들의 생동감 넘치는 삶을 느끼고 싶은 나의 바람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아직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우리 사회에서 공무원 시험은 장애에 대한 편견 없이 나 자신을 인정받으며 걸어갈 수 있는 길이라 여겨졌고, 내가 노력만 한다면 내 특별한 친구인 화면 낭독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 공무원으로서의 업무도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시험 준비 기간은 희비의 연속이었다. 먼저 내 삶에 목표가 생겼다는 것,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나에게 신선한 활력소를 제공해 주었다. 화면낭독 프로그램이 없었다면 생각도 하지 못했을 공무원 시험 준비 과정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소중하고 행복한 기쁨이었다. 화면 낭독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아 공무원 시험에 대한 수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중요 사항을 정리할 수도 있었다. 또한 문서파일로 입력된 교재들을 화면 낭독 프로그램의 낭랑한 음성으로 듣고, 듣고 또 들으면서 공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험 준비 과정이 늘 기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교재가 문서파일로 제작될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 마냥 기다리기만 할 수 없어서 결국 교재 없이 어렵게 강의를 들어야 했던 시간들, 갑자기 화면 낭독 프로그램이 작동하지 않아 하루 종일 공부도 제대로 못하고 마음 졸이며 종종거리던 시간들. 목표가 생겼다는 기쁨도 잠시, 그냥 도망가고 싶을 때도 많았다. 왜 나는 이렇게 힘들게 공부해야 하는지, 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자유롭게 공부할 수 없는 것인지 서러워서 엉엉 울며 눈물 흘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이겨냈다. 내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가족과 여러 사람들을 생각하며, 내 옆에서 종알거리는 특별한 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멈추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나도 세상의 일부가 되어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가겠다는 일념으로 나를 힘들게 했던 모든 것과 당당하게 맞서 싸웠다. 그리고 그 결과, 나는 결국 해내고 말았다.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2012년 공무원 시험 최종 합격이라는 승전보를 거머쥐었다. 늘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기웃거리던 내가, 먼발치에서 세상의 빛을 바라보기만 하던 내가 드디어 세상으로부터 초대장을 받은 것이다. 그 날의 기쁨을 어찌 한 두 마디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세상에서 구사되고 있는 모든 표현을 동원한다고 할지라도 이 황홀함을 모두 나타내지는 못하리라!

이제 나는 또 다른 출발선에 서있다. 내가 너무나 오고 싶었던 이곳, 내가 간절히 꿈꾸던 이곳에서 드디어 세상으로의 첫 발을 내딛을 준비를 하고 있다. &quet;시작&quet;이라는 단어가 항상 그러하듯 지금 내 마음은 수많은 감정들로 가득 차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설렘과 기대,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 최선을 다해 아름답게 조화되리라는 다짐까지. 앞으로 내가 걸어갈 길이 언제나 아름답고 은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웅장한 오케스트라가 늘 화려한 장조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때로는 슬프고 가슴 아픈 단조와 같은 날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실망하거나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가족과 여러 사람들의 사랑으로 힘을 얻었던 것처럼, 그리고 언제나 내 옆에서 떠들어대는 특별한 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며 힘을 얻었던 것처럼 꿋꿋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열심히 걸어가다 보면 언젠가 내 삶도 세상 속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으리라! 수많은 노력 끝에 멋진 오케스트라가 연주되듯 내 삶도 결국에는 아름다운 오케스트라 선율처럼 잔잔하고 웅장하게 울려 퍼지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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